"FOB로 하죠"라고 말하기 전에
수출 협상에서 빠지지 않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가격 조건은 FOB로 하죠." 그런데 이 짧은 세 글자에는 누가 어디까지 비용을 내고, 어느 순간부터 사고 책임이 넘어가는지가 통째로 담겨 있습니다. 이걸 모르고 계약하면, 물건이 바다에서 사라졌는데 보험도 안 들어놨고 책임 소재도 애매한 상황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인코텀즈(Incoterms)는 국제상업회의소(ICC)가 만든 무역 거래조건 규칙으로, 1936년 처음 나온 뒤 개정을 거쳐 현재 최신판이 인코텀즈 2020입니다. 이 글은 그 규칙을 "위험과 비용이 어디서 갈리는가"라는 실무 관점에서 정리합니다.
핵심 전제: 인코텀즈는 비용 부담과 위험 이전 시점을 정하는 규칙입니다. 이 둘이 항상 같은 지점에서 넘어가는 게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함정입니다.
1. 인코텀즈가 정하는 세 가지
인코텀즈 조건 하나는 아래 세 가지를 한꺼번에 규정합니다.
- 비용(Cost): 운송비·보험료·통관비·하역비를 누가 부담하는가
- 위험(Risk): 물품이 멸실·훼손됐을 때 책임이 매도인→매수인으로 넘어가는 시점
- 의무(Obligation): 수출입 통관·허가·서류 준비를 누가 하는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할 것: "운임을 내가 냈다 ≠ 위험도 내가 진다." 특히 뒤에 나오는 C그룹(CFR·CIF 등)에서 이 착각이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2. 11개 조건 한눈에
인코텀즈 2020은 11개 조건으로 구성되며, 운송수단 무관 7개와 해상·내수로 전용 4개로 나뉩니다.
모든 운송수단에 쓸 수 있는 조건 (7개)
| 조건 | 이름 | 주 운임 부담 | 위험이 매수인에게 넘어가는 시점 |
|---|---|---|---|
| EXW | 공장 인도 | 매수인 | 매도인 영업장(공장)에서 물품을 둘 때 |
| FCA | 운송인 인도 | 매수인 | 지정 장소에서 운송인에게 인도할 때 |
| CPT | 운송비 지급 인도 | 매도인 | 첫 운송인에게 인도할 때(위험은 이때 이전) |
| CIP | 운송비·보험료 지급 인도 | 매도인(+보험) | 첫 운송인에게 인도할 때 |
| DAP | 도착지 인도 | 매도인 | 목적지에서 하역 전 상태로 인도할 때 |
| DPU | 도착지 양하 인도 | 매도인(+하역) | 목적지에서 하역 완료 후 |
| DDP | 관세 지급 인도 | 매도인 | 목적지에서 수입통관·관세까지 마친 후 |
해상·내수로 전용 조건 (4개)
| 조건 | 이름 | 주 운임 부담 | 위험이 매수인에게 넘어가는 시점 |
|---|---|---|---|
| FAS | 선측 인도 | 매수인 | 선적항에서 본선 선측에 둘 때 |
| FOB | 본선 인도 | 매수인 | 선적항에서 본선에 적재될 때 |
| CFR | 운임 포함 인도 | 매도인 | 선적항에서 본선에 적재될 때 |
| CIF | 운임·보험료 포함 인도 | 매도인(+보험) | 선적항에서 본선에 적재될 때 |
그룹으로 외우면 쉽습니다. E(출발지 인도, 매도인 최소의무) → F(주운송비 매수인) → C(주운송비 매도인이 내지만 위험은 선적 시 이전) → D(도착지 인도, 매도인 부담 최대).
3. 실무에서 실제로 쓰는 4가지
11개를 다 쓰지는 않습니다. 한국 수출 실무에서는 EXW·FOB·CIF·DDP 가 거래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EXW (공장 인도) — 매도인 최소 의무
매도인은 공장에서 물건을 준비만 하면 끝. 이후 운송·수출통관·보험 등 거의 모든 책임이 매수인에게 있습니다.
- 함정: 수출통관·반출이 매수인 책임이라, 정작 수출신고 서류 처리에서 공백이 생기기 쉽습니다.
FOB (본선 인도) — 한국 수출에서 가장 흔함
매도인이 지정 선적항에서 본선에 적재할 때까지 비용·위험 부담. 배에 실리는 순간 위험이 매수인에게 넘어갑니다. 그 이후 해상운임·보험료·도착지 비용은 매수인 몫.
CIF (운임·보험료 포함 인도) — 바이어 편의 제공
매도인이 목적항까지 운임과 보험료를 부담. 단, 결정적 포인트:
- 위험은 CIF도 FOB와 똑같이 "선적 시(본선 적재)"에 넘어갑니다. 매도인이 보험료를 냈다고 끝까지 책임지는 게 아닙니다.
- CIF에서 매도인이 드는 보험은 최소담보(협회적하약관 ICC-C) 가 기준입니다. 더 넓은 보장이 필요하면 매수인이 추가로 들어야 합니다.
DDP (관세 지급 인도) — 매도인 부담 최대
매도인이 수입통관·관세까지 전부 부담해 매수인 지정 장소까지 인도. 매수인은 받기만 하면 됩니다.
- 함정: 수입국 통관이 복잡하거나 관세가 변동되면 매도인이 예상 못 한 비용을 떠안습니다. 관세 환경이 불안정한 시장에 DDP로 나갈 때는 특히 신중해야 합니다.
4. 컨테이너 화물이라면 — FOB보다 FCA
실무에서 가장 자주 잘못 쓰는 부분입니다.
- FOB·CFR·CIF는 원래 벌크(곡물·광물 등 배에 직접 싣는 화물) 를 전제로 한 해상 전용 조건입니다. 위험 이전이 "본선 적재"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컨테이너 화물은 이미 터미널(CY/CFS)에서 운송인에게 인도됩니다. 배에 오르기 전에 화주 손을 떠나는 거죠. 이때 FOB를 고집하면 터미널~본선 구간의 책임이 애매해집니다.
- 그래서 컨테이너 화물은 FCA(또는 CPT·CIP) 사용이 권장됩니다. ICC와 실무 가이드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5. 계약서에 반드시 넣어야 할 것
인코텀즈는 "조건 세 글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음을 함께 명시해야 법적으로 명확해집니다.
- 지정 장소를 구체적으로:
FOB Busan Port/DDP Amazon FBA Warehouse, CA, USA처럼 항구·주소까지 - 버전 표기:
Incoterms® 2020을 함께 기재 (구버전과 규칙이 다름) - 보험 범위: CIF/CIP로 갈 때 담보 수준(ICC-A/B/C)을 합의했는지
예: CIF Los Angeles, Incoterms® 2020
정리
[인코텀즈 2020, 이렇게 기억]
· 세 가지를 정한다: 비용 / 위험(이전 시점) / 의무
· 그룹: E(출발지) → F(주운임 매수인) → C(주운임 매도인·위험은 선적 시) → D(도착지)
· 실무 4대: EXW / FOB / CIF / DDP
[꼭 피할 함정]
1. "운임 냈으니 위험도 내 책임" → C그룹은 위험이 선적 시 이미 이전
2. CIF 보험은 최소담보(ICC-C) → 넓은 보장은 매수인이 추가
3. 컨테이너인데 FOB 고집 → FCA/CPT/CIP가 맞음
4. DDP는 수입통관·관세까지 매도인 → 관세 불안정 시장 주의
[계약서]
"조건 + 지정장소 + Incoterms® 2020" 세트로 기재
마치며
인코텀즈는 "가격 조건"이 아니라 책임의 지도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비용이 갈리고, 어느 순간 사고 책임이 넘어가는지 — 이걸 알고 협상하면 불필요한 분쟁과 예상 못 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조건을 정할 때는 지정 장소와 버전까지 계약서에 명확히 남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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