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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은 왜 본사를 옮길까 — 법인세와 비즈니스 입지의 경제학

2026-07-09법인세 · 글로벌 최저한세 · OECD

애플 자회사가 직원 0명에 매출 22조?

2013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화제가 된 사실이 있습니다. 애플의 한 아일랜드 자회사는 직원이 사실상 없는데도 막대한 이익을 신고했고, 실효세율은 극히 낮았습니다. 애플만이 아니었습니다. 구글·페이스북·화이자 같은 이름들이 줄줄이 거론됐죠.

이들이 불법을 저지른 건 아닙니다. 대부분 합법적인 세무 구조를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리고 왜 지금은 그 시대가 저물고 있을까요? 기업이 "어디에 본사·법인을 두느냐"라는 질문 안에는 생각보다 큰 경제학이 들어 있습니다.

이 글은 절세를 권유하거나 특정 구조를 추천하지 않습니다. 국제 조세는 매우 복잡하고 나라·시점마다 규정이 다르며 빠르게 바뀝니다. 실제 의사결정은 반드시 세무·법률 전문가와 상담하세요. 이 글은 공개된 사실을 바탕으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를 설명하는 교양 글입니다.


1. 기업이 입지를 고르는 이유 — 세금만은 아니다

기업이 본사나 지역 법인을 어디에 둘지 정할 때 보는 요소는 여러 가지입니다.

  • 법인세율: 이익에 붙는 세금. 낮을수록 세후 이익이 커짐
  • 인재·인프라: 우수 인력, 통신·물류, 금융 시스템
  • 시장 접근성: 주요 고객·시장과의 거리, 무역협정
  • 법·제도의 안정성: 예측 가능한 규제, 재산권 보호
  • 언어·시차·문화: 운영 편의

이 중에서 특히 눈에 띄고 논쟁적인 게 법인세입니다. 세율 차이는 곧바로 이익으로 연결되니까요. 그래서 일부 국가는 낮은 법인세를 '유치 전략'으로 삼아 왔습니다.


2. 아일랜드는 어떻게 '기업의 나라'가 됐나

대표 사례가 아일랜드입니다. 아일랜드는 2003년부터 법인세 12.5% 를 유지해 왔습니다. 미국(연방+주)이나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확연히 낮은 수준이죠. 여기에 EU 회원국이라는 시장 접근성, 영어권, 우수 인력이 더해지면서 수많은 미국 IT·제약 기업의 유럽 거점이 됐습니다.

'더블 아이리시'란 무엇이었나

여기에 더해, 2010년대 중반까지 악명 높았던 구조가 더블 아이리시(Double Irish) 입니다. 핵심 원리만 짚으면 이렇습니다.

  • 미국은 회사의 세금 거주지를 '설립된 곳' 기준으로 판단
  • 아일랜드는 '실질적으로 경영되는 곳' 기준으로 판단
  • 정의 차이(틈) 를 이용

기업은 아일랜드에 두 개의 회사를 세웁니다. 하나는 아일랜드에 등록돼 있지만 실제 경영은 버뮤다 같은 무세금 지역에서 이뤄지도록 설계됩니다. 그러면 아일랜드는 "이 회사는 버뮤다 거주"라 보고, 미국은 "아일랜드 거주"라 봐서,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과세되지 않는 상태가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로열티를 흘려보내는 '더치 샌드위치'까지 결합하면 세금은 더 줄었습니다.

구글이 이 방식의 대표 사례로 알려졌고, 애플은 가장 큰 규모로 활용한 것으로 미 상원 조사에서 지적됐습니다.

왜 사라졌나

국제사회 압박이 커지자, 아일랜드는 2015년부터 신규 기업에 대해 더블 아이리시를 단계적으로 폐지했고, 기존 기업도 2020년 말까지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즉 이 '틈'은 이제 막혔습니다. 다만 무형자산 상각 같은 다른 방법으로 실효세율을 낮추는 시도는 이어졌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3. 게임의 규칙이 바뀌었다 — OECD 글로벌 최저한세

가장 큰 변화는 OECD/G20이 주도한 '글로벌 최저한세(Pillar Two)' 입니다. 약 140개국이 참여한 합의로, 핵심은 단순합니다.

연 매출 7.5억 유로 이상의 대형 다국적기업은, 어느 나라에서 영업하든 그 나라에서 최소 15%의 실효세율을 내야 한다.

만약 어떤 나라에서 실효세율이 15%보다 낮으면, 그 차액만큼 '추가세(top-up tax)' 를 물립니다. 낮은 세율로 이익을 빼돌릴 유인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죠.

주요국은 어떻게 됐나

  • 아일랜드: 표면 법인세 12.5%는 유지. 단 대상이 되는 대형 다국적기업에는 국내 추가세(QDMTT)로 15%까지 맞춤. 다만 매출 7.5억 유로 미만인 99% 이상의 기업은 여전히 12.5% 적용 (2023년 말부터 시행)
  • 싱가포르: 표면 법인세율은 17% 그대로. Pillar Two는 2025 회계연도부터 적용해 대형 다국적기업 실효세율을 15%로 끌어올림
  • 이때 '15%'는 표면세율이 아니라 회계상 계산되는 실효세율(ETR) 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싱가포르처럼 표면세율이 17%여도, 각종 인센티브로 실효세율이 15% 아래로 떨어지면 추가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세율 낮은 나라로 이익을 옮겨 세금을 최소화한다"는 20세기식 전략의 약발이 크게 줄어든 시대입니다.


4. 그럼 이제 기업은 무엇으로 입지를 정하나

세금 차익의 매력이 줄면서, 기업 입지 논리의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 실질(substance): 실제 사람·설비·활동이 있는 곳. Pillar Two에도 인건비·유형자산 기반의 '실질 공제'가 있어, 껍데기 회사보다 진짜 사업 실체가 있는 입지가 유리
  • 인재와 생태계: 반도체·AI·바이오처럼 특정 산업 클러스터가 있는 곳
  • 시장 접근성: 관세·무역협정, 주요 고객과의 거리
  • 제도 안정성·삶의 질: 장기적으로 인재를 붙잡는 요소

세금은 여전히 중요한 변수지만, "세금만 보고 껍데기 법인을 세우는" 방식은 점점 통하지 않습니다. 대신 '진짜 사업을 어디서 하느냐'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5. 한국 기업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이건 실리콘밸리 거대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 한국의 대형 그룹·다국적기업도 매출 7.5억 유로 기준을 넘으면 Pillar Two 대상입니다. 해외 자회사의 실효세율 관리가 새 과제가 됐습니다.
  • 해외 진출을 검토하는 중견·중소기업이라면, 진출 후보국의 법인세율뿐 아니라 실질 요건, 무역협정, 인재·시장을 함께 봐야 합니다.
  • "세율 낮은 나라"만 좇는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 자체가, 정공법(진짜 시장·진짜 실체) 으로 승부하는 기업에 오히려 유리한 환경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리

[기업 입지 결정 요소]
법인세 · 인재/인프라 · 시장 접근성 · 제도 안정성 · 언어/시차

[아일랜드 사례]
- 2003년부터 법인세 12.5% (낮은 세율로 기업 유치)
- '더블 아이리시': 미국·아일랜드 거주지 정의 차이를 이용한 합법 절세
- 2015년부터 단계 폐지 → 2020년 말 종료

[게임 체인저: OECD 글로벌 최저한세(Pillar Two)]
- 약 140개국 합의
- 매출 7.5억 유로↑ 다국적기업, 어디서든 실효세율 최소 15%
- 미달 시 '추가세(top-up tax)'
- 아일랜드 12.5% 유지(대상 기업은 15%로 top-up), 싱가포르 표면 17%

[변화의 방향]
'세율 낮은 곳' → '실질(사람·설비·활동) 있는 곳'으로 무게 이동

마치며

기업이 본사를 어디에 두느냐는 단순한 주소 문제가 아니라, 세금·인재·시장·제도가 얽힌 전략적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지금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낮은 세율만으로 승부하던 시대가 저물고, 진짜 사업 실체와 시장 경쟁력이 다시 중심에 서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 뉴스에서 '최저한세', '조세피난처' 같은 단어가 나올 때, 그 뒤에 이런 큰 흐름이 있다는 걸 알면 훨씬 입체적으로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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